그해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영화, 조지 클루니가 감독, 각본에 직접 출연까지 한 영화, 흑백의 차분한 영상미에 다이안 리브즈(Dianne Reeves)의 멋드러진 Jazz가 찰랑대는 영화,
그런데 이 영화,
사실 국내에서는 개봉관도 제대로 못 잡았고 한 달도 못 돼 간판을 내렸다.
우선 이 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 1908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하여 1965년 뉴욕에서 숨을 거뒀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 미국 언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CBS 본사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놓여져있다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Hear It Now"를 TV로 옮긴 "See It Now"를 진행하며 소위 "PD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1961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해외공보처(USIA) 처장으로 임명되어 1964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리고 에드워드 머로와 함께 "See It Now"를 제작했던 프레드 프렌들리(Fred W. Friendly). CBS 뉴스국장을 지냈고 미국 내 공영방송인 PBS 설립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1966년에 그는 CBS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과 관련한 상원 청문회 대신에 "내 사랑 루시"를 방영하자 이에 항의하여 회사를 그만 둔다.
또 한 사람, 그의 동료로 나오는 뉴스 앵커 돈 할란벡(Don Hollenbeck). 2차 세계 대전 시 이탈리아 전선 종군 방송으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잘못을 지적하는 에드워드 머로의 방송 직후에 뉴스를 진행하면서 공개적으로 머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로 인해 할란벡은 잭 오브라이언(Jack O'brian) 등 매카시를 지지하는 우익 칼럼니스트들에 의해 공개적이고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비난이 계속되던 와중에 그는 1954년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한다.
이 영화는 위 인물들이,
1950년대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실을 왜곡/과장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미국 사회를 극도의 우경화로 몰고갔던,
후에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狂風을 주도했던 죠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비판하면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허풍이나 과장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2006년 개봉 당시 대한민국의 관객들에게 어떤 공감도, 분노도, 긴장도 전해주지 못했다. 그저 먼 옛날 남의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가 80~90년대의 우리 관객, 아니 개봉 이후 겨우 6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관객들에게 보여진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나 반향이 나올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 젊은 관객들에게 매카시즘이란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자신의 생각과 신념 때문에 인권이 침해되고 인신이 구속된다는 것.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단지 일부 기득권 층의 그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 위해를 당하고 그것이 당연시 되는 것.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권력의 이익에 반한다하여 감시당하고 견디기 힘든 불이익이 닥쳐드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과연 지금 그게 먼 옛날 남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
80, 90년대에 우리들은 이런 얘기를 하곤 했었다. 미국은 그나마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미국의 언론인들은 하고자 하는 말은 하고야 마는 언론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언론의 자유, 언론인의 자세를 원한다,
허나 그게 가능하기 위해 수많은 평범하고 성실한 미국인들이 당해야했던 희생과 눈물이 있었음을,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낸 교훈이 있었기에 더욱 치열하고 소중한 기본권이라는 건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던 그들이 2005년 즈음에 다시 그걸 꺼내 되돌아보며 탄식했었다. 조지 클루니는 당시 미국 사회에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고, 함께 메시지를 만들어 보자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우리들은 이런 영화에 좀체로 감정이입이 되질 않아 애써 졸음을 참으려 애쓰다가 기어이 잠이 들거나 끝까지 보더라도 누가 이런 영화를 보자고 그랬는지 일행과 다투거나 했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명제가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사회나 팀스포츠에서 개개인을 어떤 틀이나 목표에 묶어서 조련을 하고 독려를 하면 그 개인 각각의 역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반면에 그 틀이 엉성하거나 감독의 방식이 그르면 오히려 결과는 매우 허접해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보면 저 말은 그렇다라는게 아니라 그래야한다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의 속내를 보면 그 안의 부분들이 고르게 더 나은 결과를 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위는 역량보다 몇 배 뛰어난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어떤 단위는 역량에 근접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또 어떤 단위는 아예 결과를 깎아먹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틀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단위는 슈퍼스타가 되고 어떤 단위는 소위 "Loser"가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그닥 차이가 없어보이는데도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걸까.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많이 다른 단위들을 하나의 틀에 넣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보면 모든 단위에게 어느 정도의 획일성과 몰개성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를 잘 받아들이면서 훌쩍 뛰어 넘으면 슈퍼스타가 될 터이고 그저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면 필요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단위가 될 터이며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루저가 될 터이다.
루저를 지나쳐서 아예 탈락자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개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섞이지 못하거나 섞임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별의 능력이 부족함에도 전체에 어떤 형태로든 과다밀착하여 마땅한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또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해 탈락하는 이들은 그저 못난이에 불과한 것일까.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게, 전체 속의 유용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에 서투른 이도 홀로 무언가를 만들고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매우 뛰어난 경우가 많이 있다. 역사를 살펴보거나 아니면 그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아도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쯤되면 전체와 부분을 구분한다는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전체 속에서 훌륭히 기능하는 단위는 따지고 보자면 유능한 Soloist인 것이고,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하는 Soloist도 그에게 맞는 전체가 주어지면 또한 훌륭한 단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나다니엘 (제이미 폭스 분)에 대해서 국내 홍보문구는 "삶의 길을 잃어버린 천재 음악가"로 써놓았는데, 사실 영화 속 내용에서는 나다니엘을 천재라고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가 본 아이 중 가장 재능있다고 한 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홍보태그도 "Nathaniel Ayers had lost his way. He was about to get a second chance. (삶의 길을 잃은 나다니엘, 두 번째 기회를 얻으려하다.)"라고 돼있다.
여하튼 첼로연주에 재능을 가진 나다니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의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한채 오로지 밤이고 낮이고 첼로에 몰두하였고 '홀로'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음악계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걸로 유명한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허나 그 순간부터 나다니엘은 길을 잃기 시작한다. 재능있기로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료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함께 연주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겹치면서 낙오를 하고야 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던 나다니엘은 우연히 유명 신문 칼럼니스트 스티브(로버트 다우니 쥬니어)의 눈에 띄게 되고, 첼로를 연주하는 부랑자라는 점에 끌린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정상(?)의 삶으로 끌어올리고자 애쓰게 된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 생활환경을 제공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유명 지휘자와 종교인 등에게 소개를 시키고 후원을 부탁하는 등 스티브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나다니엘을 정상인, 아니 그 이상의 훌륭한 연주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브가 그리는 그림일 뿐이었고, 나다니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고 발벗고 나선 이들 누구도 정작 나다니엘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나다니엘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래서 벗어나야만 했던 틀과 유사한 틀을 다시 씌워주려 했을 뿐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여러가지로 다르게 다시 해도 무방하다. "절이 싫으면 뜯어 고쳐라", "절이 싫으면 사람들을 모아 새 절을 만들라", "절이 싫으면 힘을 길러 주인이 되어라", "절이 좋으면 사람들이 더 모이게 애쓰라" 등등 ......
하나의 절이라는 전체가 훌륭한 각 구성 부분들이 합쳐져서 그렇게 좋아진 것 만큼이나, 각각의 구성 부분을 전체로 잘 아우를 수 있어야 좋은 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 전체와 부분은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전체를 위해 부분이 과도하게 희생하거나 일부가 전체인양 모든 걸 좌지우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굳이 말로 다시 쓸 필요가 없겠다. 그러니 절이 싫으면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 틀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구성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인지를 잘 가려서 그에 따라 대처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데에 있다. 보통 부분은 전체에 비해 힘이 턱없이 적고 여러 부분들이 힘을 합쳐도 기존의 전체와 맞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중들이 떠나고 만다.
오늘도 나의 솔로는 경계선에서 연주되고 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중간 쯤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 전체의 문제점에 대해 적절히 분노하려고 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이 초라한 연주도 아니다. 이런 솔로는 매우 많아서 보통 다른 이들의 연주와 뒤섞여 그냥 퉁쳐서 한묶음으로 들린다. 참 피곤하면서 티도 안나는 솔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들 중에도 어느 하나는 전체를 이끄는 한편, 어느 솔로는 전체와 동떨어져서 홀로 연주하곤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퉁쳐서 한묶음 속에서 연주하면서 거기에서도 나서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속에서 연주도 안하고 놀면서 묻어가려고 한다. 이 중에 어느게 좋은 건지, 맞는 건지는 당연히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터이지만.
나라의 일꾼들에 대한 소중한 검증의 자리를, 하루나 이틀에 걸쳐 후딱 치르는 바람에 무엇 하나 제대로 살펴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확인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어쩌면 그리도 구질구질하냐는 것이다.
"죄송하다" "부덕의 소치다" "잘 몰라서 그랬다" "나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사과하겠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 않겠나" "앞으로 잘 하겠다" 등등 ...
이런 말들이 과연,
국민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몸바쳐 일하고자 하는 고위관리 후보자들이, 자신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달라고 요청하고 검증받는 자리에서 나올 말들인가. 이건 흡사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관대함을 구할 때 하는 읍소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능력은 검증할 생각도 않고 과거의 일을 들춰 흠집내기에 열중한 검증인들의 탓이 크다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자. 개인의 능력은 대개 어떻게 평가하는 건지를.
적어도 내가 알기로 개인의 능력은 그동안 해온 일을 놓고 평가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걸 기준으로 삼아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잘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과 비전을 검증하게 된다.
헌데 후보자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의 대부분이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며 잘 몰라서 그랬던 것들일 때, 과연 그 후보자가 앞으로 얼마나 잘 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고위관리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회개와 갱생의 자리도 아니고 말이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묻자. 우리 나라에 정말 인재가 그리도 없는 것인가.
그래서 저렇게나 죄송해야 할 일이 많고 재테크 등에는 범법을 저지를 용의가 있었거나 몰랐거나 하는 사람들을 굳이 저런 자리를 통해 면죄부를 주어서라도 막중한 일을 맡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라에 편법과 무지를 용인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급박한 변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나도 알고 있고 그들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허나, 그들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음에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더는 할 말이 없긴 하나, 한 가지 엉뚱한 이유로 아쉬웠던 건 저 많은 후보자들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대해 당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 하나 과거 발언과 행동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루어진 거라고 얘기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임명권자에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는 길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신이라도 펼쳐보인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긴 했다. 선출직이면서 임명직이고 그래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장관자리의 후보자가 "지금 단계에선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사람이 찬성하는 사람을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는데, 재밌게도 그 장관자리가 말하자면 찬성하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과 잘 소통하여 원활한 국정에 보탬이 되게 하라는 임무를 띄고 있는 걸 보면 저 발언은 제대로 에러이다.
어쨌든, 국회에서의 검증내용이 어떠하든 임명권자는 그냥 밀어 붙이거나 체면치레 정도로 막아보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더 이상 지적하는 것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부디, 후보자들 모두 청문회에서 자신의 입으로 하였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잊지말고 가슴에 새겨 국정에 임하기를, 그리고 행여나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나쁜 생각은 모두 버려주기를 바란다.
"This country needs more than a building right now. It needs hope."
뭔가 많이 부족하고 무척이나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들지만, 나름의 열정과 철학이 담겨있는 그런 영화들 말입니다.
어찌보면, 메이저와 단절된 가공되지 않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요즘의 블로그들과 조금 닮아있기도 한 그런 영화들인 거죠.
사실 페니웨이 님의 블로그가 1인 미디어이자 온라인 개인 저널이라는 weBLOG의 정의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기도 한 것이, 1인 포탈을 지향한다는 본인의 뜻처럼 그 많은 컨텐츠를 홀로 만들어내고 있으며, "지나친 폭력이나 선정성이 두드러지는 19금 작품들은 리뷰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괴작 뿐만 아니라 최신작, 고전,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시각과 철학에 입각해 저널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페니웨이 님이 개인적으로 요즘 심적으로 많이 힘드신 듯 한데 ... ... 그거야 우리 알 바 아니고 ^^;;; (농담이고요, 부디 모든 일이 어서 잘 풀리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힘을 내 괴작열전 뿐만 아니라 이를 능가하는 꾀죄죄열전 등 명품 포스팅이 줄을 이어 올라와주길 기대합니다.
표절(剽竊)
남의 창작물(創作物)(문학(文學)ㆍ음악(音樂)ㆍ미술(美術)ㆍ논문(論文) 등)을 그 내용(內容)의 일부(一部)를 취(取)하여 자기(自己) 창작물(創作物)에 제 것으로 삼아 이용(利用)하는 것 [다음 한자사전에서 인용]
표절의 정의는 확실하다. 그래서 이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방이나 오마쥬 또는 패로디 등 여러 형태의 유사행위가 있지만 표절과는 달리 이런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원작자를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를 함께 하기도 한다.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놈의 표절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소위 지도층입네 대표자입네 학자입네 하는 이들이 앞다퉈 다른 이의 글과 말과 아이디어를 베끼거나 살짝 변형하여 원래 제 것이라 하고 있고, 설령 들통이 나도 그렇지 않다는 궤변을 지나 뭐 어쩌라는 말이냐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우리의 대중음악계에서도 이런 사정은 다를 바가 없어서, 표절에 관한 논란은 쉬지 않고 터져나오고 그러다가는 이내 사그라든다. 물론 유독 거기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모양이나 자꾸 얘기해서 뭐하겠냐만 그래도 한 번 씩 짚어는 봐야 할 터이다.
1.아가씨
9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은 노래 '엘렝의 춤 (La danse d'Hélène by Méli-Mélo feat. Miss Hélène)' ... 일단 들어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노래일텐데, 요즘도 노래방 등에서 흥겹게 불리고는 하는 '97년도에 나온 '아가씨'의 원곡이다. 노래를 들어보나 악보를 보나 두 노래는 같은 노래다.
헌데 이것도 처음에는 국내 작곡자의 작사, 작곡으로 등록이 되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내 표절 논란이 벌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작사는 장본인이 작곡은 외국곡, 즉 번안곡으로 수정을 하였다. 그랬음에도 웹을 뒤져보면 여전히 이 곡의 작곡자는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 분의 이름으로 명기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경우는 표절을 넘어서서 아예 통째로 베꼈는데도 그냥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사실 냉정히 말해 원곡이 희대의 명곡도 아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곡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냥 처음부터 번안곡, 요즘 말로 리메이크라고 했으면 누구 하나 뭐라 안 하고 즐겨 들었을 터인데.
2.조영남
Tom Jones의 대표곡 'Delilah' [작사곡: Barry Mason, Les Reed] (딜라일라, 삼손과 데릴라의 그 데릴라) ... 로 당시 그야말로 충격적인 데뷰를 한 가수 조영남.
그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기 이전에 대표곡으로는 '제비'와 '고향의 푸른 잔디' 그리고 좀 지나서 '내 고향 충청도'가 있다. 그는 이 곡들로 장장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 헌데 '제비'는 멕시코 민요 'La Golondrina'가 원곡이고 '고향의 푸른 잔디'는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리고 '내 고향 충청도'는 미국 민요 'Banks Of The Ohio'가 원곡이다.
그는 처음부터 모두 번안곡이라 밝혔고 이에 누구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으며 모두 즐겨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만약 그가 이 중 한 곡이라도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면 안 그래도 곡절 많고 안티 많은 그의 가수생활은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3. 슬퍼지려 하기 전에 ...
노래 한 곡 더 들어보자.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노래는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의 원곡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곡이 좋으면 원작자에게 곡을 받아서 당당하게 불러라. 요새는 친분이 없다고 해도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작권협회에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거의 모든 곡을 사용할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같은 곡으로도 얼마든지 색다르고 좋은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니까 대박나고 좋잖냐 ...
4. Creep
'90년대 팝계를 대표하는 명곡 중의 명곡, Radiohead의 'Creep'.
이 노래도 'The Air That I Breathe'와 코드 전개와 멜로디가 유사한 부분이 일부 있어서 처음에는 표절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실은 Radiohead가 앨범 노트에 이 곡의 작사곡자인 Albert Hammond와 Mike Hazlewood에 대해 언급을 해 놓았었다. 그리고 표절 논란이 나온 이후에는 위 두 사람이 공동 작곡자로 등록이 되었다.
처음부터 저작권에 등록을 안 한게 그냥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약간 비슷하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후에라도 그걸 바로 잡았기에 이 노래는 명곡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5. 찜찜하기만 해도 하지마라!
표절 논란이 있을 때마다 대부분의 해당 작곡자는 변명하기에 바쁘다.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우연의 일치다'
'스타일이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노래다'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거다'
'일부 소절이 닮았지만 표절은 아니다' 등등 ...
그러나 대중음악은 어떤 경우에는 스타일이나 느낌이 전부일 경우가 있다. 그럴때 몰랐다느니, 반음이 낮고 높다느니, 전개가 차이가 난다느니 등의 과학적(?) 해명은 별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혹시라도 정말 우연의 일치로 매우 닮은 곡이 이전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냥 쿨하게 인정해라.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 원작자의 양해를 구하겠다고. 영감을 얻은 거라면 그랬다고 표시하고 오마쥬라면 오마쥬라고 얘기하고 패로디라면 확실히 비틀고 그랬게 해라. 그래도 원작자는 언제나 밝히고 인정하고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남의 곡에서 몇 구절을 슬쩍 가져오거나 아예 통째로 베낀 거는 사실 그냥 범죄다. 그러나 이 범죄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권리를 포기하면 그닥 큰 처벌 없이 용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걸리기 전에 애초부터 하지를 말고 어리석은 마음에 일을 저질렀다가 걸렸으면 머리 조아려 사과해라.
대중은 느낌으로 음악을 듣는다. 그런 대중들을 향해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작곡기법을 강의하려들고, 당신들이 음악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따져드는 이들은 이제 좀 그만 보았으면 하는게 작은 소망이다.
하반기 영화계 최고의 화제작인 "아바타"가 개봉을 하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2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라서 많은 영화 팬들이 기다려왔고 또한 시사회 등을 통한 사전 입소문이 워낙 호평인지라 잔뜩 기대를 하고 보았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크게 나무랄 데가 없어보이는 이 영화 ... 사실 오락영화로는 꽤 괜찮다 할 수 있지만 ... 과연 그리도 호들갑스러운 호평이 쏟아질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단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화려하고 정교한 CG가 돋보이는 수준급 오락영화라고 해야겠다. 허나 이 영화에는 "걸작"이라든가 "혁명"으로 불리기에는 적절치않은 요소가 곳곳에 있다.
1. CG
3D로 구현되면 더 멋지다는 이 영화의 CG, 사실 2D로 보아도 이 영화 속 CG가 매우 멋지고 정교하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크게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엄지 두 개를 추켜세워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놈의 사실성이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물에서 CG가 사실성을 얻게되는 요인은 관객들이 그 CG를 자신의 경험이나 상상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레퍼런스가 있어서이다. 그 공간이나 배경이 제아무리 환상적이라해도 결국은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해도 납득이 가고 그럴듯할 때 우리는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그에 비해 만화의 경우는 그런 리얼함이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건 만화니까 ...
이 영화의 CG는 그 점에서 뭔가 좀 메롱스럽다.
공간적 배경은 '판도라'행성이고 시간적 배경은 2154년. 이건 어디에서 어떻게 레퍼런스를 끄집어 내야할지 난감해진다. 무엇과 비교하여 이 CG가 리얼하고 정교한지 판단을 해야 할까. 그냥 환상의 세계니까 받아들이라고 우기면 어쩔수 없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은유가 현재 지구의 우리 현실과 매우 밀착되어 있으니 그저 판타지 만화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나비족이나 동, 식물은 "에일리언" 등의 영화에서 구현하는 완전 별종도 아닌 현재 지구의 인간 그리고 열대우림 속 생물들과 약간의 디테일만 다를뿐 거의 판박이들이다. 게다가 무기도 "매트릭스" 등에서 보아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전투장면도 기존의 영화들에서 본 것과 유사한 설정과 전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감독의 어떤 상상력이 CG를 통해 "영상 혁명"적으로 새롭게 구현된 건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못난 의문점 하나.
영화에서 CG의 존재이유 또는 지향점이 뭘까. 너무나 리얼하여 도저히 실사와 구분할 수 없는 경지인가. 진짜와 똑같아지려고 한다면 뭐하러 그러지 ... 그냥 진짜를 쓰면 될텐데. 그리고 거기에 가면 더 이상 실제 배우와 물리적 특수효과는 필요가 없게 되는 건가. 실제의 배우와 특수효과는 고비용 저효율이라 기술로 그걸 어찌해보려는 건가. CG는 영화에 있어서 보조수단이어야 할텐데 왜 우리는 자꾸 그것이 마치 영화의 메인인 것처럼 취급하는지 의문이 든다.
2. 메시지 또는 철학의 허술함
제임스 카메론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틀이 잡히고 무르익은 감독의 메시지 또는 철학을 보고자 하는 건 무리인 걸까. 그러나 그의 대표작 중 "에일리언" "어비스" " "터미네이터" 등의 작품에는 단순히 상업성을 위해 마구 지어낸 얘기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져있고 이는 관객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여전히 그 현재성이 건재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의 작가로서 또한 감독으로서의 온전한 의도였는지는 "트루 라이즈"나 "타이타닉"같은 스펙타클형 오락영화를 보게되면 판단하기가 조금 애매해진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때 그때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화면과 느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시하는 특출한 재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작품 대부분이 상업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메시지들이라는게 줄곧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거나 매우 즉흥적인 것으로 느껴져왔고 실제 작품 내에서도 어물어물 버무려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 나름의 그런 재능을 억지로 깎아내리려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 매우 풀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풀 수가 없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화면 하나하나가 화사한 색감을 자랑하며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을 다루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주제에서 감독은 무협지식 악의 상징을 내세우고 모호한 선의 모습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리얼한 CG를 구현하여 관객들에게 근사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자 만든 영화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왜 굳이 이런 주제를 담으려 한 것일까. 차라리 잔혹한 외계생물체에 맞서서 싸우는 지구방위대 아니 행성연합방위대의 활약을 담을 수도 있고 인류에게 소중한 자원이 가득한 어느 행성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훈훈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도 있었을텐데.
환상의 세계에서 굳이 현실의 지구를 연상시키려고 애쓰는 이런 모습이 혹시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전 작품들에서 그저 어렴풋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선과 악의 문제, 또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 등이 12년 간의 세월 속에서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되어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그는 2145년의 판도라를 현실 지구의 아바타로 형상화하려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와 지구촌의 현실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과 사유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많은 영화와 도큐멘터리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고, 많은 관객들도 이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하고 고뇌하다가 마땅한 답이 없음에 안타까이 답답해했던 문제를 이런 오락영화에서 다시 들고 나와서는 어설픈 결말로 허탈하게 마무리 짓는 건 참으로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에 이 영화를 그럴듯하고 뭔가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주제를 양념 삼아 뿌려놓은 거라면 매우 실망스러울 터이다.
3.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 ...
* 판도라의 상자는 다 아시다시피 한 번 열면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 튀어나오고 다시는 이를 주워 담을 수 없다. 행성 판도라의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맨 아래 하수인을 물리치고 나머지 병력을 몰아낸다고 해서 과연 지구의 권력자들이 행성 판도라를 포기할까?
그럴리가 없다. 그들은 둘 중의 하나 또는 둘 다의 방식을 택하여 다시 올 것이다. 더 강력한 병력을 보내든가 아니면 평화사절단을 보내서 유화책을 쓰든가. 그리되면 나비족은 갈등하고 대립하게 될 것이다. 현실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투쟁을 주장하는 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로 나뉘어서 말이다. 이건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고 또 보고 또 보아온 과정이다.
그러다가 나비족은 소위 문명의 발달이라는 포장 안에서 지구인들처럼 탐욕의 존재로 변해 가거나 아니면 지구 고대 문명의 부족들처럼 멸망하든가 할 테고 말이다.
** "Unobtainium", 즉 불가득물질이라는 말이다. 상용의 과학용어도 아니고 지구상에는 없는 상상의 물질을 비유하는 의미로 "터미네이터"에서 비슷한 용어가 나오기도 한다. 애써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자면 '울트라 짱 캡쑝 물질'정도 되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명칭의 물질 때문에 지구에서 판도라를 침탈하고 나비족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되는데, 적어도 이런 중요 물질에 대해서는 그나마 물질의 용도에 대한 설명이나 의미있는 명칭이라도 붙여주는게 최소한의 성의는 아닐까.
*** "Karma(카르마)"라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행위"를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업(業)"이라는 단어가 있다. 은근히 미국 쪽에 이런 걸 다루는 극이 많은데 "내 이름은 얼"이라는 TV 시리즈의 주제가 바로 이 카르마이다. 업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사람은 그 의도가 어떻든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마련인데,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속죄가 있어야 죄가 갚아지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 카르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의도가 좋든 나쁘든 판도라의 침탈에 관여한 중요인물들은 그 죄값을 치르게 하고 다시 태어나는 제이크는 새로운 삶으로 전이하여 승화시키니 말이다.
영화 "모범시민"의 원제는 "Law Abiding Citizen", 즉 준법 시민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석이 '모범'이든 '준법'이든 그게 그거 아니냐고 볼 수 있지만, 이 영화가 법을 지키며 사는 소박한 시민들의 권리가 되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법의 틈새를 이용해 심판을 모면하는 범죄자들과 법을 이득과 출세의 도구로 삼는 집행자들을 처단하는 내용으로 전개되기에 '준법'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이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작성된 그 곳, 허나 20세기 초에는 부패의 상징으로도 불리던 도시 필라델피아인 점도 이 영화가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애쓰는 걸로 보인다.
예고편을 보았을 때는 거대한 액션신이 연신 터져나오는 치밀하고 후련한 복수극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였지만 ... 실제 영화는 그것과는 무척 거리가 멀고도 멀다.
영화의 주인공 클라이드는 미국 사법집행시스템의 변질과 불합리성에 맞서 싸우고자 10년을 준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사실 미국의 사법체계에 대해서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체계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자 그리 한 것이다.
스스로가 변론에서도 얘기하듯 그는 자신을 "준법 시민(Law Abiding Citizen)"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가 자신에게는 변질된 사법집행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지방검사 닉에 대해서 품은 회한도 결국은 왜 기존의 시스템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고 제멋대로 재단하여 뒤틀었는가라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닉에게 ... 왜 있는 그대로 법정에서 다투지 않았는가 ... 그랬다면 그 결과가 비록 바람직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 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클라이드는 자신의 행위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잘못된 사법집행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라고 줄곧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아젠다를 전파하기 위해 시위나 정치참여 또는 숭고한 희생을 택한 것이 아니라 ... 당한 대로 갚아주리라, 그러면 너희들이 배우리라 ... 라는 폭력과 살인이 동반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그 대상이 부패한 권력이나 질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대 범죄집단도 아닌,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범죄자와 - 그 죄질은 몇 번 죽어도 동정 받지 못할 추악한 것이다 - 조력자 그리고 그 범죄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 법집행자로 한정되어지면서 좀체로 다른 대상으로 그 방식을 적용시키기 곤란해진다.
결국 클라이드의 행위는 그가 내세우는 아젠다와는 맞지 않게 개인적인 복수극으로 귀결되어버리고 말며, 그가 벌이는 복수극이 나름의 정당성을 잃고 복수의 대상이 직접 당사자를 넘어서 시스템 집행의 상층부로 확대되려는 순간에 그는 제지를 당하고 영화는 서둘러 마무리된다.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가 시작된다!"라는 문구로 홍보되고있는 이 영화.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의 복수는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통쾌"하지를 않다.
추악하고 간교한 거대 범죄자에 맞서는 평범한 시민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는 많다. 그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몰입하여, 마침내 악인이 피흘리며 쓰러질 때 자신도 모르게 희열을 맛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리할 수는 없지만 영화라는 대리 경험을 통해 통쾌함 또는 후련함을 느끼는 것이다.
뒤틀리고 부패한 시스템에 대해 폭로하고 경고하는 정치 영화 또한 많다. 이런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왜 그리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는지를 누군가는 짧게 누군가는 깊고 길게 고민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도저도 아니다. 범법자가 심판을 받아도 그게 최종 목적이 아니기에 관객은 후련함을 느끼기 힘들고, 그렇다고 미국 사법현실에 존재하는 커다란 문제점을 까발려 타격하는 것도 아니니 ... 그냥 어정쩡한 거다.
그렇다고 감독의 목을 조르면 안되지 ...
하나 더 짚어보자면, 무려 10년을 철저히 준비해 온 암살전문 전략가의 전술과 실행과정이 어찌 그리 허술한 건지,
뭐 이해는 간다. 주인공이 복수와 아젠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여타의 액션영화들처럼 아무렇게나 거리낌 없이 때려 부수거나 쓰러뜨릴 수가 없어서 호쾌한 액션신이 나올 구석이 없을게다. 그래도 10년을 준비한 전문가의 행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엉성하다.
최근의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를 보다보면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를 느낄 정도로 꽤나 많은 한국계 배우나 한국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계가 연기력이 더 뛰어나서인 건지,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가 미국 내에서 이전보다 많이 높아져서인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암튼 몇 년 전까지에 비하면 인기 시리즈의 메인 캐릭터 중에 한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재미삼아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어서 대략 정리를 해보았다.
일단 조연급 이상 고정출연자 위주로 정리를 하였는데, 혹시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한국계나 한국계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이 더 있다면 댓글로 제보하여 주시기 바란다.
먼저 Usual Suspects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산드라 오 (Sandra Oh)
1971년 7월 20일생 / 캐나다 온타리오 /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남.
現 출연작: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인턴 크리스티나 양 役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에서의 분노의 화이바질이 지금도 인상 깊은 그녀는 아마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중에 가장 성공한 이일 것이다.
캐나다에서 연극과 TV 그리고 영화로 다채로운 배우활동을 펼친 그녀는 캐나다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Genie Awards에서 두 차례 (1994년과 1999년)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였고, 1996년에는 미국의 TV 시리즈 "Arli$$"에 출연하며 미국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2005년에 영화 "사이드웨이"의 성공으로 미국 관객들에게 더욱 친숙해진 그녀는 그 해에 방영을 시작한 TV 시리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에 캐스팅된다.
이후 현재까지 6시즌이 진행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성공가도 질주에 톡톡히 일조를 한 그녀의 연기는 미국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으며 2005년부터 5회 연속 에미상 후보에 올랐고 2006년에는 골든글로브 TV 시리즈 부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였다.
* 원래는 레지던트 베일리 역을 제안 받았다는데, 본인이 크리스티나 역할을 강력히 요구하였다나 어쨌다나~
** "사이드웨이"의 감독인 알렉산더 페인과 2003년 결혼하였으나 2006년에 이별.
[미국의 토크쇼 "지미 키멀쇼"에 출연한 산드라 오. 영상 중간에 부모님들 모습도 보임.]
2.마가렛 조 (Margaret Cho, 한국이름 조 모란)
1968년 7월 20일생 /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남.
現 출연작: "드롭 데드 디바 (Drop Dead Diva)", 비서 테리 리 役
그녀의 경력과 삶이 조금만 덜 굴곡졌더라면 아마도 마가렛 조는 미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배우겸 코미디언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무대에 홀로 서서 신랄한 풍자와 독설로 주로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모든 사회현상을 조롱하는 걸 장기로 삼는다.)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1994년에 American Comedy Awards에서 최고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상을 수상하는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그녀가 주인공인 TV 시리즈 "All American Girl"이 1994년에 ABC를 통해 방송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리즈로 인해 그녀의 삶과 경력은 굴곡지게 되었다. 아시아인을 지나치게 비하한다는 비난과 너무 미국적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고, 제작사는 그녀가 너무 뚱뚱하고 얼굴이 지나치게 펑퍼짐하다고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 여파로 다이어트에 중독된 그녀는 시리즈가 1시즌으로 종결돼버리는 수난을 겪으며 약물과 알콜중독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1999년에 재기한 그녀는 본업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다시 나섰고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그녀의 독설은 더욱 날카롭게 톤을 높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데일리 쇼" "섹스 앤드 시티" "더 뷰" 등 다수의 인기 TV 프로그램과 "페이스 오프"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2009년에 13편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하고 현재 시즌 2가 제작 중인 "드롭 데드 디바 (Drop Dead Diva)"를 통해 안방극장의 메인 캐릭터로 컴백한 그녀의 활약을 기대해보자.
* 어머니의 한국 액센트를 흉내내며 웃음의 소재로 삼기도 하고 게이의 권리쟁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의 모습에 재미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녀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이 꽤 많이 존재한다.
**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매우 적극적인 反 부시 인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토크쇼 "더 뷰 (The View)"에 출연한 마가렛 조.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은 여기에서도 여전하다.
3.존 조 (John Cho, 한국이름 조 요한)
1972년 6월 16일생 / 서울 /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플래시포워드 (Flashforward)", FBI 요원 드미트리 노 役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LA로 이민을 온 존 조는 1996년에 UC버클리를 졸업하고 잠깐 영어 선생님을 하기도 했다 한다.
광고전단의 모델로 연기경력을 시작한 그는 1999년 영화 "아메리칸 파이 (American Pie)"에 출연하여 MILF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연기자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저 단어의 뜻은 각자 알아서 파악해 보시라 ...)
이어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파이 2" 등에 출연하던 그는 2004년의 영화 "해롤드와 쿠마 (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그 후 TV쪽으로도 활동영역이 대폭 넓어진 그는 "키친 컨피덴셜" "어글리 베티" 등의 TV 시리즈와 2009년 영화 "스타트렉 (Star Trek)"에도 출연하였다.
그리고 현재 인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TV 시리즈 "플래시포워드"에서 한국계 FBI 요원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 "해롤드와 쿠마" 3편은 당분간 보기 힘들듯 하다. 왜냐하면 쿠마(Kal Penn)가 오바마 행정부의 관직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라능~
** 역시 배우인 케리 히구치와 결혼하여 1남을 둔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동성결혼금지법에 대한 반대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코미디쇼 "매드 TV"에 출연한 존 조. 함께 나오는 이는 레귤러 멤버인 바비 리.]
여기서 잠깐,
위 동영상에 등장하는 바비 리(Bobby Lee)에 대해서 알아보자.
4. 바비 리 (Bobby Lee)
이 친구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72년 9월 17일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출생하였고 한국계이며 본명이 Robert Lee Jr. 라는 정도.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경력을 시작한 바비 리가 미국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Fox방송을 통해 14년 동안 방영되다 2009년에 종영한 "매드 TV(MADtv)"에 진출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여기에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고정출연진으로 맹활약하였는데, 초기에는 아시아인을 희화하는 보조역할로 시작하여 최근에는 주요 멤버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매드 TV"는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Saturday Night Live, SNL)"와 유사한 형식의 코미디 쇼인데, 내용은 SNL보다 파격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즈질'이라고 맹비난받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바비 리가 MADtv에서 한국의 드라마를 패로디한 코너를 선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걸 한 번 보도록 하자.
봐서 알겠지만 이게 말하자면 "막장"드라마의 원조라해도 좋을만큼 막 나가는 코너이다.
뭐 어쨌든 이 코너가 은근 인기가 있어서 현재 유툽에는 4부작이 올라와있으니 위 동영상이 재밌다고 느낀 분은 직접 찾아서 감상하시면 되겠다.
참, 혹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웃겨만 주면 장땡인 영화를 즐기는 분이라면 바비 리가 단역으로 출연한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Pineapple Express)" 강추다. 이 영화에 한국인 갱단이 나오는데 "다 죽여버려, 씨*놈들 ..." 따위의 한국말 대사가 슝슝 날라댕긴다.
자, 그럼 이제부턴 그냥 무순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5. 제임스 카이슨 리 (James Kyson Lee, 한국이름 이 재혁)
1975년 12월 13일생 / 서울 / 열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히어로즈 (Heroes)", 안도 마사하시 役
처음에 히로의 충실한 동료로 시작하여 이제는 능력자의 반열에 올라 선 그.
"히어로즈"가 일본에서도 꽤나 인기인지라 일부 일본 친구들이 왜 굳이 일본인 역에 한국계를 캐스팅했냐고 툴툴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뭐 어쨌든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여 이제는 고정출연자의 자리를 확보한 그는 이전에도 "CSI LV" "West Wing" 등 인기 시리즈에 잠깐 잠깐 출연한 적이 있다.
* 이 친구 짬짬이 패션모델로도 뛰고 있다능~
6. C.S. 리 (C. S. Lee, Charlie Lee)
1972년 12월 30일생 / 청주 /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덱스터 (Dexter)", 플로리다 경찰 CSI 빈스 마수카 役
살인범을 연쇄살인하는 경찰요원 덱스터의 밉지않은 변태(?) 동료인 청주 출신 챨리 리.
"Sopranos" "Law & Order" 등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Chuck"에서 나름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덱스터"를 통해 고정출연자로 자리를 잡은 그의 향후 활약을 기대해 보자.
7. 팀 강 (Tim Kang, 한국이름: 강일아)
1973년 3월 16일생 / 샌프란시스코
現 출연작: "멘탈리스트 (Mentalist)", CBI 요원 킴벌 조 役
UC버클리 학사에다가 하바드 석사 출신인 그.
"Shell" "AT&T" 등 굴지의 기업 광고에서 모델로 활동하던 그는 2002년부터 "Sopranos" "Law & Order" "Monk" "The Unit" 등의 TV 시리즈와 "Two Weeks Notice" "Forgotten" "Rambo 4"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 인기 시리즈 "멘탈리스트"에서 과묵하고 진지한 한국계 형사역으로 고정배역을 확보하였다.
8. 다니엘 헤니 (Daniel Phillip Henney)
1979년 11월 28일생 / 카슨 시티
現 출연작: "쓰리 리버즈 (Three Rivers)", 닥터 데이비드 리 役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능~ ^^
9. 그레이스 박 (Grace Park)
1974년 3월 14일생 / LA 출생, 캐나다에서 성장
現 출연작: "배틀스타 갈락티카 (Battlestar Galactica)", 중위 샤론 발레리 役
개인적으로 아무 주저 없이 최고의 미드 중 하나로 꼽는 "배틀스타 갈락티카".
보통의 시리즈와 비교하면 극의 전개가 좀 늘어지는 편이지만, 미드를 좋아하는 분에게 항상 권하는 시리즈이다.
바로 이 시리즈의 2004년 1시즌부터 2009년의 4시즌 종영까지 극의 중심에서 Key 역할을 한 해군 비행사 중위 샤론 "부머" 발레리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그레이스 박이다.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한 이 시리즈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맥심지에도 등장한 그녀는 몇 차례 그 잡지 Hot 100 리스트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래는 인증샷 ...
사실 2009년에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무수한 매니아들의 탄식을 뒤로 하고 종영이 되었기에, 그녀를 어떻게 소개해야하나 초큼 고민을 했었는데 ...
1.
어느 지인의 블로그에 최근 올려진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논리적인척하는 글을 논리로 맞서주면 논리적인척을 논리로 대꾸해주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렇다. 논리의 외피를 씌운 억지나 일방적 주장에는 따박따박 논리로 대꾸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이나 글에 논리로 맞서다가는 정작 논의되어야 할 내용은 사라지고, 누구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다느니 그래서 누구 말이 더 신뢰가 간다느니 나아가 둘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등의 하등 쓸모없는 말싸움만 켜켜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언론법 권한쟁의 청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언론법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접어놓고 보아도 도무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내용을 이 나라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재가 무려 104쪽이나 되는 길다란 결정문에 적어 발표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게 무의미할테고, 그저 비아냥거릴밖에 없을 터이다.
이렇게 말이다.
2.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헌재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누군가.
최상위 사법기관이고 최고, 최양질의 논리를 생산 및 규정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의 법리와 논리는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는 기준이자 레퍼런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결정이 아무리 비논리라고 해도 마냥 비아냥 거리기만 할 수는 없어보인다.
하여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이 나오게 된 논리의 흐름은 이렇다.
1) 법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효다. 2) 법을 어겼다. 그러나 결과를 부정할 만큼은 아니다.
3) 법을 어겼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라.
4) 법을 어겼다. 그러므로 무효다.
이 네 가지 견해를 종합하니, [법을 어겼다 --> 그래도 유효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이기까지 했다.
요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여기에서 헌재관계자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정치적 물 타기를 하려고 했다면 속된 말로 이렇게 지저분한 결정을 했겠나.
헌재가 권한침해는 확인해놓고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했으니 결과적으로 양쪽에게 어중간한 판결을 내린 게 아니냐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다. 만일 헌재가 정치적으로 판결할 요량이었다면 아예 문턱에서 차버렸을 것이고, 재판관들이 방송사 테이프까지 증거조사한 마당에 정치적
판결 비판은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지저분한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 애써 "정치적"이지 않으려다보니까 그렇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
보자. 위 네 가지 견해 중에 "지저분"한 고려가 없는 것은 몇 번인가.
1)번과 4)번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지 않게 "문턱에서 차버"리든가, 무효로 판결하든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2)번과 3)번의 견해에서 보듯 법리 이외에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한 "지저분"한 결정이 내려져서 오히려 판결이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헌재관계자의 말을 또 인용해보자.
헌법재판소의 한 관계자는 "국회 자율권이 필요한 영역까지 헌법재판소가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무효확인을 선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통과과정의 적절성에서 권한침해를 했다고 확인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장이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여러 정치의견을 형성하라는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여야는 헌법재판소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타협해 다시 발의하는 등 정치적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는 게다. 실제
헌법재판관별로 온도차는 있지만 피청구인측에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당연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만일 이 같은 일이 국회에서 되풀이 된다면 헌법재판소는 향후 헌법소원에서 준엄히 꾸짖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헌재가 "정치적"이지 않은 판결을 내린 거라면 어째서 단서조항이 붙었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단서조항의 의미는 결국 '이번에는 봐줄테니까 니들끼리 쫌 잘해봐라. 그런데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국물도 엄따!'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법리와 논리를 넘어서는 일종의 고려가 개입된 것이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건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헌재가 아무리 애써 자율을 권고하는 이행 명령의 성격이라고 강변한다 해도 말이다.
3.
애써 헌재의 입장을 이해하자고 들면, 일단 삼권분립의 같은 축인 국회의 일을 헌재가 처분하려니 어색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고 같아보이는 사안이라도 정황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가 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벌어진 낯 뜨거운 일에 대해 굳이 법으로 일도양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었음직도 하다.
말하자면, 음주운전자의 난폭운전에 의해 차량이 파손된 운전자가 가해자를 처벌해 주십사 하자 판사라는 분이 '범퍼가 살짝 긁혔을
뿐이고 ...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가해자가 이후 추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고 ... 피해자가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니 ... 자꾸 법원에 찾아오지말고 서로 좋게 합의봐서 끝냅시다'라고 권고한 격이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실제 있었던 판결이 하나 떠오른다. 근친 성폭행 피해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해당 가해자를 풀어준 그 판결 말이다.
헌재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국회와 그 대표자격인 국회의장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것이라고, 그러니 국회와 국회의장은 위법한 행위를 거쳐 통과된 법률에 대해 마땅히 자율적으로 추가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이번 건에 대해 자율적으로 어떤 합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거나 또는 깊은 성찰을 통해 상호 양보를 통한 타협을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헌재에 권한쟁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판결 이후에 보듯이 권한을 침해한 측에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측도 공식적인 사과 하나 없으며, 권한을 침해당한 측은 위법으로 인해 빼앗긴 우리의 권한은 어떻게 된 거냐며 억울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헌재는 이번 건에 대해 진정 "정치적"이지 않고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기각/각하나 아니면 무효 판결을 내렸어야 옳았다. 이런 고려 저런 사정을 따지다보니 말마따나 "어중간"하고 "지저분한" 판결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상황이 일단락되고 자율적인 개선이 진행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 청구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듯 하다.
헌재가 국회에 대해 '그대들의 일을 자꾸 우리에게 떠넘기려 하지 말아라'라고 도돌이표를 달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리 했어야 했고, 그도 여의찮았으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수미일관한 판결을 주었어야 했다.
지금 헌재나 권한침해자 측에서는 '... 했지만 ... 은 아니다'라는 댓글놀이를 하는 이들을 보며 법도 논리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떠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히려 정말 몰법리 몰논리한 쪽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